내가 보기에 산상수훈의 핵심 본문은 “그들을 본받지 말라”(마 6:8)다. 그것은 오래전 이스라엘에게 하신 “너희는…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레 18:3)는 하나님의 말씀을 곧바로 연상시킨다. 똑같은 명령인데, 즉 다르게 되라는 것이다. 그리고 산상수훈 처음부터 끝까지 이 주제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들의 성품은 세상 사람들이 흠모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라야 했다(팔복). 그들은 세상에 가득 찬 어둠 속에서 등불처럼 빛나야 했다. 그들의 의는 윤리적 행동에서나 종교적 헌신에서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아야 했으며, 그들의 사랑은 이웃한 이교도들의 사랑보다 더 크고 그들의 야망은 이교도들의 야망보다 더 고상해야 했다.
--- 「서론. 다르게 살라는 가르침!」 중에서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며, 첫째를 꼴찌라고 부르시고, 꼴찌를 첫째라고 부르시며, 종을 위대하다고 여기시고, 부자를 빈손으로 보내시며, 온유한 사람이 그분의 후사라고 단언하신다. 이렇게 세상의 문화와 그리스도의 대항문화는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은 세상이 가장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을 경축하시고, 세상에서 거부당한 사람들을 ‘복되다’고 칭하신다.
--- 「1. 역설의 신비, 팔복」 중에서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되라는 두 가지 소명,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과 복음전도의 책임을 마치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듯 서로 대립시켜서는 절대 안 된다. 우리는 다른 하나를 희생해서 둘 중 하나를 과장하거나, 둘 중 하나를 비방해서도 안 된다. 둘 다 상대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 세상은 둘 다 필요로 한다. 세상은 상해 있으며 소금이 필요하다. 세상은 어두우며 빛이 필요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둘 다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 「2. 맛을 잃고 밖에 버려져 밟히는 소금」 중에서
그리스도인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우리 마음대로 율법의 기준을 낮춰 더 순종하기 쉽도록 만들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궤변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의는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한다.
--- 「3.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중에서
물론 이 가르침은 관용에 관한 현대적 기준에 완전히 역행한다. 그것은 영원이 순간보다 중요하고, 순결함이 문화보다 중요하며, 내세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하다면 이생에서의 어떤 희생도 가치 있다는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당신은 이생에서 살 것인지 내세에서 살 것인지, 세상 사람들을 따를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 「4. 노하지 말라, 보지 말라, 가지 말라」 중에서
이 말씀을 현대에 어떻게 적용할지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맹세하는 것(즉, 서약을 하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 자신의 진실하지 못함을 애처롭게 고백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약속을 할 때 뭔가 엄청난 표현, 곧 “천사장 가브리엘과 천군천사에 의지해서 맹세한다”거나 “거룩한 성경에 의지하여 맹세한다”는 말로 시작하고 싶어 할까?
--- 「5. 완악한 이혼과 진실하지 못한 맹세로 기만하지 말라」 중에서
예수님이 주위 세상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 앞에 제시하는 모델은 우리 위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선한 자들뿐 아니라 악한 자들에게도 친절하시므로, 그분의 자녀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 옛 (타락한) 인류의 삶은 대체로 공정한 처리에 근거했다. 손해를 입으면 복수하고 호의에는 보답하는 것이다. 새 (구속받은) 인류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복수를 거절하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이다.
--- 「6. 가장 큰 도전, 원수를 친구로 변화시키는 사랑」 중에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관객으로 선택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성전 헌금함에 사람들이 헌금을 넣는 것을 지켜보셨듯이(막 12:41 이하), 하나님은 우리가 드릴 때 우리를 지켜보신다. 우리가 은밀히 기도하고 금식할 때, 그분은 그 은밀한 곳에 계신다. 하나님은 위선은 미워하시지만, 진실함은 사랑하신다. 그 때문에 그분의 임재를 의식할 때만 우리의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 진짜가 될 것이다.
--- 「7. 위선자가 되지 말라, 보시는 분도 갚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중에서
이처럼 우리는 먼저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형성한 다음 그분의 성품을 기억하고 그분의 임재를 연습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절대 위선자처럼 기도하지 않고 언제나 진실하게 기도할 것이며, 기계적으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언제나 깊이 생각하면서 기도할 것이다.
--- 「8. 기계적이고 무의미한 기도를 멈춰라」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은사를 개발하고, 기회를 넓히며, 영향력을 확장하고, 직장에서 승진하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들 자신의 자아를 부추기거나 그들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다. 그보다 더 사소한 야망들은 그 자체가 목적(우리 자신)이 아니라 더 큰 목적(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전파하는 것), 모든 목적 중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이라면 무방하다. 이것이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하는 ‘최고 선’이다. 다른 것은 없다.
--- 「9. 자신을 위한 야망인가, 하나님을 위한 야망인가」 중에서
우리는 이 장 첫 부분에서 기독교적 대항문화는 단지 개인의 가치 체계나 생활 방식이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라는 것에 주목했다. 그것은 관계를 포함한다. 그리고 기독교적 공동체는 본질상 하나의 가족, 하나님의 가족이다. 그리스도인의 의식에서 가장 강력한 두 가지 요소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 및 그리스도를 통해 형제자매가 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의식일 것이다. 동시에 우리가 가족 안에 데리고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가족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도 절대 잊을 수 없다.
--- 「10. 아버지, 형제자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태도」 중에서
협소하고 좁은 길을 따라가는 여행자로서, 그분은 다른 순례자들과의 교제를 누리며 삶의 목표에서 눈을 떼지 않으신다. 진리의 투사로서, 그분은 그 진리를 왜곡시키고 그리스도의 양 떼를 약탈하는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라는 그리스도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신다.
--- 「11. 넓은 길과 양털을 쓴 이리를 경계하라」 중에서
필생의 일(life work)이나 평생의 동반자(life partner)를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것은 생명(life)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길로 향할 것인가? 어떤 토대 위에 집을 지을 것인가?
--- 「12. 아는 것을 행하는 자인가, 행하지 않는 자인가」 중에서
출판사 리뷰
추천 독자
- 산상수훈에 대해 명확히 알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 산상수훈을 실제로 살아내기 원하는 그리스도인
- 리더십, 제자반 등 각종 훈련 및 모임을 갖는 교회
- 예수님의 가르침을 현대에 맞게 풀이해 주고자 하는 교역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