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본질 회복을 촉구하는 청년서신으로 기독교의 핵심인 말씀, 믿음, 구원 그리고 삶 이 네가지 가치를 통해 신앙의 본질을 단단히 규명하고 있는 책이다.
출간일 | 2002-0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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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수 | 280 |
무게 | 376 g |
ISBN | 89-365-0191-7 |
믿음 - '백문'과 '일견'의 너머
인간의 눈은 멀리 있는 것을 보지 못하며, 아주 가까이 그러니까 바로 눈앞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한다. 우주처럼 큰 것을 볼수 없는가 하면 세균처럼 미세한 것도 볼 수 없다. 태양처럼 밝은 것은 물론이요 암흑같이 어두운 것 또한 보지 못한다. 시야를 차단하는 장애물이 있으면 그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도리가 없다. 분명히 내 신체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내 속 어느 곳에 무슨 병이 들어 있는지조차 보지 못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을 볼 도리는 없다. 만약 인간의 눈이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속았다'거나 '배신당했다'는 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눈은 자기 앞일을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 단 1초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다. 9.11 테러로 인해 어이없이 목숨을 잃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앞일을 내다볼수 있었던들, 그날 그 시각 그 참사의 현장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사실이긴 하지만, 인간의 보는 능력이란 이처럼 불완전하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인간 시력의 진상이 이러하다면 청력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은, 청력의 효율성이 시력의 10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인간 시력의 100분의 1에 불과한 청력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시력과 청력을 포함하여 인간의 인식능력이란 이렇듯 보잘 것 없고, 또 지극히 제한적이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믿음이 시작된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나의 가족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만약 지금 내가 그들을 볼 수 있다면 그들의 모습과 상태를 인식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현재 내 인식의 범위 너머에 있기에 나는 지금 이 시간 그들이 무사하리라 믿으면서 계속 글을 쓰고 있다. (...)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와 똑같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인식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은 인식의 대상으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온전한 인식이란 불가능하기에, 즉 인간의 제한된 시력과 청력으로는 온전히 하나님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믿음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시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믿음을 떠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될 수 조차 없다. 그래서 '믿음장'으로 불리고 있는 히브리서 11장 1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pp 78~80
신앙의 본질 회복을 촉구하는 청년서신으로 기독교의 핵심인 말씀, 믿음, 구원 그리고 삶 이 네가지 가치를 통해 신앙의 본질을 단단히 규명하고 있는 책이다.
1949년 부산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한 뒤, 1974년 홍성통상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주목받는 경영인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나 회사와 개인 삶에 닥쳐온 위기를 계기로 ‘선데이 크리스천’의 영적 위선을 벗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된다. 1985년 장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신학 공부와 목회 수련을 거쳐 1988년 주님의교회를 개척했다. 개척 초기의 약속대로 10년 임기가 끝나자 사임한 뒤 자원하여 총회 파송 선교사로 떠나 스위스 제네바한인교회에서 3년간 섬기면서 여러 해외 한인교회에서 말씀을 전했다. 2001년 귀국하여 개인복음전도자로 말씀을 전하며 집필에 전념하던 중,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의 부름을 받아 2005년 7월 10일부터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회자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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